242 0 0 0 2 0 5년전 0

新周易正義內傳本義覽

신 주역 원본 주역정의 주역내전 주역본의 종합본

新周易正義內傳本義覽 周易 周易正義 序 國子祭酒上護軍曲阜縣開國子 臣 孔穎達이 勅令 받들어 짓나이다. 易은 象이고 爻는 效(나타냄)이다. 聖人이 天文을 우러러 관찰하고 地理를 굽어 살펴서 天地를 형상하여 여러 물건을 기르고,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듯 하여 四時를 본받아 만물을 낳으시니, 만약 이것을 순히 따르면 兩儀가 차례대로 운행하여 온갖 물건이 和하고, 만약 거슬러 행하면 六位가 기울고 五行이 혼란해진다. 그러므로 王者는 동할 적에 반드시 天地의 道를 본받아서 한 물건이라도 본성을 잃지 않게 하고, 행할 적에 반드시 陰陽의 마땅함에 화합하게 하여 한 물건이라도 폐해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宇宙를 彌綸(두루 다스림)하고 神明과 酬酌할 수 있어서, 종묘와 사직이 이 때문에 무궁..
新周易正義內傳本義覽


周易

周易正義 序

國子祭酒上護軍曲阜縣開國子 臣 孔穎達이 勅令 받들어 짓나이다.
易은 象이고 爻는 效(나타냄)이다. 聖人이 天文을 우러러 관찰하고 地理를 굽어 살펴서 天地를 형상하여 여러 물건을 기르고,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듯 하여 四時를 본받아 만물을 낳으시니, 만약 이것을 순히 따르면 兩儀가 차례대로 운행하여 온갖 물건이 和하고, 만약 거슬러 행하면 六位가 기울고 五行이 혼란해진다.
그러므로 王者는 동할 적에 반드시 天地의 道를 본받아서 한 물건이라도 본성을 잃지 않게 하고, 행할 적에 반드시 陰陽의 마땅함에 화합하게 하여 한 물건이라도 폐해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宇宙를 彌綸(두루 다스림)하고 神明과 酬酌할 수 있어서, 종묘와 사직이 이 때문에 무궁하고 風敎가 이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道가 지극히 현묘한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참여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乾坤의 큰 조화요 백성의 유익한 바이다. 龍馬가 黃河에서 나옴에 八卦가 그 象을 펴고, 麒麟이 늪에서 부상을 당함에 十翼이 그 用을 드러내서, 사업은 凡人과 聖人이 모두 이용하고 때는 三古를 지났다. 秦나라에 이르러 金鏡(밝은 道)을 잃었으나 斯文이 실추되지는 않았고, 漢나라가 珠囊을 다스려서 儒雅(儒學)를 중흥시켰다.
≪周易≫을 전한 자로는 西都에는 丁寬, 孟喜, 京房, 田王孫이 있었고, 東都에는 荀爽, 劉表, 馬融, 鄭玄이 있었으니, 대체로 번갈아 서로 祖述한 것이요, 뛰어난 자는 없었다. 오직 魏나라 王輔嗣(王弼)의 注는 유독 古今에 으뜸이니, 이 때문에 江左(江東)의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의 학문을 전하였고, 河北 지방의 학자 중에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자가 적었던 것이다. 江南 지방에서 만든 義疏는 10여 家가 있는데, 모두 내용은 玄虛를 숭상하고 뜻은 浮誕한 것이 많다.
근원을 따져보면, ≪周易≫의 이치는 다 알기가 어려워서 비록 玄妙하고 또 玄妙하나, 규범을 남기고 법칙을 만듦에 이르러서는 바로 有를 가지고 有를 가르친 것이다. 內空과 外空에 머무름을 논한 것과 能과 所에 나아간 說로 말하면, 바로 뜻이 釋氏(佛敎)와 관련된 것이요 孔門(儒學)에서 가르친 것이 아니니, 이미 근본을 위배한 것이며 注와도 어긋난다.
復卦에 “七日來復”이라고 한 것에 있어서는 모두 해석하기를 “七日은 마땅히 七月이 되어야 하니, 陽氣가 建午月인 5月로부터 사라져서 建子月인 11月에 이르러 처음 회복되는 것이다. 지나간 것이 일곱 地支이기 때문에 七月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王輔嗣의 注에는 “陽氣가 처음 깎여[剝] 다하였다가 와서 회복하는 때[復]까지가 모두 七日이다.” 하였으니, 이는 陽氣가 깎여 다한 뒤에 무릇 七日을 지나 처음으로 회복된 것이다. 다만 陽氣가 비록 建午月에 처음 사라지나 建戌月에 이르러도 陽氣가 아직 남아 있으니, 어떻게 七月에 와서 회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鄭康成(鄭玄)은 易緯의 說을 인용하여 “建戌月은 陽氣가 이미 다하였고 建亥月은 純陰이 用事하며 建子月에 이르러 陽氣가 처음 생겨나니, 이 純陰 한 卦(十月의 坤卦)와 떨어져 있는데 卦는 6日 7分을 주관하므로 그 成數를 들어 말하여 ‘七日來復’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仲尼의 緯書에 분명히 밝혔고 王輔嗣의 注가 이와 같으며 鄭康成의 說에서는 남은 자취를 찾을 수 있다. 王輔嗣가 앞에서 注를 냈는데 여러 학자들이 뒤에서 이를 위배하니, 그 義理를 고찰해보면 어찌 통할 수 있겠는가?
또 蠱卦 卦辭에 “先甲三日이요 後甲三日이다.” 하였는데, 王輔嗣의 注에 “甲은 처음으로 만든 명령이다.” 하였으니, 또 漢나라 때의 甲令, 乙令과 같다. 王輔嗣는 또 말하기를 “명령이 충분히 젖어들어야 처벌할 수 있다. 그러므로 3일 뒤에 한 것이다.” 했다.
또 巽卦 九五 爻辭에 “先庚三日이요 後庚三日이다.” 하였는데, 王輔嗣의 注에 “거듭 명령함을 庚이라 이른다.” 하였고, 王輔嗣가 또 말하기를 “甲과 庚은 모두 거듭 명령하는 것을 이른다.” 했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은 鄭康成의 설에 附和雷同하여 말하기를 “甲은 명령을 선포하는 날이니, 3일 전에 辛을 쓰는 것은 改新의 뜻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요, 3일 뒤에 丁을 쓰는 것은 丁寧의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王氏가 注를 낸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않은데, 또 그 注를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異端의 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이미 勅命을 받들어 刪定하면서, 일을 고찰함은 반드시 仲尼를 宗主로 삼고 義理를 밝힘은 먼저 王輔嗣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는 화려함을 제거하고 실제를 취해서 진실하여 증거를 갖추고자 해서이다. 문장이 간략하고 이치가 요약되니, 적으면서도 많은 것을 制裁하고, 변하여 능히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재주가 비루하고 식견이 짧아서 뜻을 두루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朝散大夫 行大學博士 臣 馬嘉運과 守大學助敎 臣 趙乾叶 등과 마주 대하여 함께 의논해서 可否를 자세히 살폈으며, 貞觀 16년(642)에 이르러 또다시 勅命을 받들어서 예전에 疏를 만들었던 사람과 給事郞 守四門博士 上騎都尉 臣 蘇德融 등과 함께 勅使인 趙弘智를 마주 대하여 다시 자세히 살펴서 ≪正義≫를 만드니, 모두 14권이다. 행여라도 위로는 聖人의 道를 돕고 아래로는 장래에 유익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 대략을 서술하여 책머리에 붙이는 바이다.
貞觀 16년( AD 642년)

唐 國子祭酒上䕶軍曲阜縣開國子 孔 穎達 삼가 씀.


왕 부지 (王 夫之)
周 易 內 傳 著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자는 이농(而農), 호는 강재(薑齋)이며 호남성 형양(衡陽) 출신이다. 만년에 형양의 석선산(石船山)에 상서초당을 지어 거처하였으므로 선산선생(船山先生)으로도 칭해졌다. 그는 일찍부터 영재라는 칭찬이 높았고 청년시대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를 준비하는 동안에 명이 멸망했다. 명의 패망에 1648년 직접 청에 대항하여 형산에서 거병하였으나 패배한다. 이후에 반청운동과 함께 오주로 옮겨가있던 남명 정부를 찾아가 행인사행인(行人司行人)으로 취임하지만 명나라가 쫓겨 다니는 처지에서도 부패와 정쟁을 벌여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으나 고필정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에 왕부지는 명나라의 회복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병을 구실 삼아 세상을 피해 떠도는 은거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이 시기에 스스로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영력실록(永曆實錄)》있다. 그 후 반만(反滿) 민족의식과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약 40여 년간 학문연구에 전념하며 《독통감론(讀通鑑論)》, 《주역외전(周易外傳)》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왕부지는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 청초의 3대 학자로 일컬어진다.

1) 이하지변(夷夏之辨)
이민족인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저항한 왕부지는 한족과 이민족은 생겨날 때부터 종류와 무리가 서로 다른 만큼 유가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요청하는 인(仁), 의(義), 신(信), 지(智), 용(勇)등의 덕목이 이적과 관련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중국이 오랑캐를 섬멸해도 불안이 되지 않고, 오랑캐를 속여도 불신이 되지 않으며, 그 땅을 개간하고 빼앗아도 불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을 섬멸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야말로 인(仁)이며 그들을 속이고 그들이 나쁘다고 보는 것을 행함이 신(信)이고, 그들의 풍속을 중국문화로 바꾸고, 그들의 땅과 자원을 빼앗아 우리 백성의 힘을 키우는 것이 의(義)이다.”
이러한 극단적 논리의 전제는 변방의 이민족이 끊임없이 중국 민족을 괴롭혀 왔다는 것 등의 편협한 주장으로 객관적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겠지만 당시 왕부지는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 비분강개하며 화이론(華夷論)의 입장을 무척이나 강조하였다.

2) 사학자로써의 왕 부지
왕부지의 역사관은《독통감론(讀通鑑論)》과 ≪송론(宋論)≫에 나타나 있다. 두 책은 기본적으로 왕조와 각 왕조에서 제왕의 제위순서를 살펴 각 시기의 중요한 역사사실을 평론하였다. 왕부지는 중국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황제 시대 이전에는 오랑캐의 상태에, 복희 이전에는 금수의 상태에 있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며 그런 상태에서 점차 고도로 발전한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역사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왕부지의 역사관을 진화론적인 역사관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문물제도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고 보았으므로 특정 제도를 만고불변이라고 보는 선왕주의 혹은 복고주의를 비판하였다.
왕부지의 사학은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선대의 경험과 교훈을 당시의 실천에 응용하도록 주장하였다. 왕부지는 사료와 관점을 서로 결합하는 형식으로 역사에서 사건변화의 규율을 모색하였고 이러한 역사운동의 변증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만년의 실패를 반성하며 중국역사에서 경험과 교훈을 통하여 명나라의 멸망원인을 검토하였고 민족부흥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은 선명한 실천목적을 가지며 이것은 왕부지의 하여금 정치의의와 일정한 투쟁성을 갖게 하였다. 당시 전국이 만주귀족의 압박 하에 처하여 져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이전의 정통론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강렬한 민족사상을 표현하였다.

朱 熹
周易本義

南宋의 朱熹(1130-1200)가 주역을 해설한 주석서로 12권이다. 남송의 대학자 朱熹는 徽州 婺源(지금의 江西省 婺源에 해당) 사람으로 자는 元晦 혹은 仲晦이고 호는 晦庵, 晦翁, 雲谷老人, 滄州病叟이며 시호는 文으로 朱文公으로 칭한다. 만년에 建陽(지금의 福建省에 속함) 考亭에 옮겨와서 紫陽書院에서 강학을 주관하였다.
朱熹는 일생의 대부분을 講學하는 데에 보냈다. 經學과 史學 文學 樂律을 비롯하여 여러 방면에 모두 조예가 있었다. 역학에도 정통하여 그의 역학은 후세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 朱熹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면서 程頤(1032-1107)의 理氣論을 더욱 계승발전시켜서, 유학사상을 정리하여 방대한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건립하였다. 주희는 理氣論을 완성하였고 理氣개념을 근간으로 자연과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주희는 理가 만물의 질료인 氣의 운동의 법칙이자 인간의 도덕적 원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역≫ <계사전>에서의 ‘太極’을 만물의 본원으로서의 理라고 하고 만물은 또 각기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천지만물 본체와 현상의 상호 연관을 말하였다.
주희의 철학체계는 독창적이고 아주 방대하면서도 정밀하여 전래의 거의 모든 철학 사상이 그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었다. 주희는 중국 성리학의 집대성자로 그의 학문은 이후 동양사회를 이끄는 지도 이념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朱子學 혹은 閩學으로 불리지만 程頤와 더불어 程朱理學 및 性理學 등으로 불리는 新儒學의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주희의 저작으로 ≪주역본의≫ 외에 ≪太極圖說解> ≪通書解≫ ≪易學啓蒙≫ ≪西銘解≫ ≪四書章句集註≫ ≪四書或問≫ ≪詩集傳≫ ≪楚辭集註≫ ≪參同契考異≫ 등이 있고, 후인들이 ≪朱文公文集≫과 ≪朱子語錄≫ 등을 편찬했다.



끝.







乾道成男坤道成女
此皆其相摩相盪所變化之形象也陽下起而鼓動乎陰成雷霆之象而為震陰入場下而散陽之亢以使和浹成風雨之象而為巽陰陽交相跌相區以相連則成日月寒暑相易之形象而為坎離乾以圃而致其奇於耦中坤以柔而致其耦於奇內則成男女之形而為良兌皆形象之固有而易於八位之中櫛其各成之變化炳耽鼓既湮既成則繇是以變化元方以生五十六卦皆此至足之健順不率巴於摩盪者為之也此周易之窮理達化所以極其至而立義精也巽兼言雨者陰澤下流亦雨象也日南則寒北則署月雖一十七日有奇周於九道而冬至之月恆在夏至之黃道夏至之月恆在冬至之黃道月南則暑月北則寒矣艮兌不言山澤言塊女者山陵為牡谿谷為牝也此上言天地自然之化以下則推原麟乾坤健順之德帆其斬似起萬化而統全易之理乃終以希聖希天之學示學易者於乾坤拉建而得崇德廣業之樞要此章之次序也乾知大始坤作成物
聊天室對話結束
輸入訊息⋯⋯

㈜유페이퍼 대표 이병훈 | 316-86-00520 | 통신판매 2017-서울강남-00994 서울 강남구 학동로2길19, 2층 (논현동,세일빌딩) 02-577-6002 help@upaper.net 개인정보책임 :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