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山中國五大詩人詩集
序.菩 薩 蠻
李 太 白
平林漠漠烟如織
寒山一帶傷心碧
暝色入高樓
有人樓上愁
玉階空佇立
宿鳥歸飛急
何處是歸程
天寶 1年 ( AD 742 ) 新山大陸五大詩人詩全 新山大陸五大詩人詩全
凡 例
新山大陸五大詩人詩全外儒全經
序 3
1.次 例 4
2.李白詩千 5 ㅡ 292
3.杜甫詩千 293 ㅡ 997
4.白樂天詩千 998 ㅡ 1391
5.蘇東坡詩千 1392 ㅡ 1872
6.王維詩全 1873 ㅡ 2070
7.附 2071 ㅡ 2072
8.略 2073
이상 중국대륙 5대시인 全詩作 總收錄化ㅡ!
新山中國五大詩人詩集
.李白詩千
.杜甫詩千
.白樂天詩千
.蘇東坡詩千
.王維詩全
이상 중국대륙 5대시인 全詩作 總收錄化ㅡ!
略
1.李白詩千 1011
2.杜甫詩千 1609
3.白樂天詩千 1625
4.蘇東坡詩千 2263
5.王維詩全 405
1
序Poet. Li Bek :李白詩 3百 33
李 白 이 백
AD. 701ㅡ762
中國 唐나라 詩人.
字는 태백(太白), 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촉나라 쓰촨 성 출생이다. 東洋 三國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서 시선(詩仙)이라 함.
현재, 약 1100여 수의 詩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1. 詩人의 삶
본래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서,
중앙아시아 교역하는 무역상인 부친과 살아 이백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이다.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땅에 체류한 적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한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의 개방성은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다가 젊어서는 한때 도교(道敎)에 심취했는데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며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였다.
그의 詩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山中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실현을 기대했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2. 人生 文學期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評한 하 지장(賀 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과대적 방약무인한 태도와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다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미움을 받아, 44세에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사직하고는 창안(長安)을 떠나게 되었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李 白은 맹호연(孟 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杜 甫)등 많은 시인과 교류했고 특히 말년 장안떠난 이후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 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서 헤어진 뒤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당대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62세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 양빙(李 陽氷)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盛唐 대표 시인 이백의 시는 신선(神仙)과 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바, 李白詩風은 젊은 시절은 협기, 만년은 신선, 전생애는 술이 바로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곧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李白詩는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才,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 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다,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3.李 太白 시집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이후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고,
서유럽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1862년 《당 시대의 시들》(Poesies de l'Epoque des Thang)이다. 영어권에는 허버트 앨런 길레스가 1901년 중국 문학사를 펴며 처음 실렸다.
자유로우며 시적으로 영향력 있던 번역작은 에즈라 파운드가 日本語 번역된 이 태백 시를 重譯한 것이다.
2
杜甫詩 3 百 33
杜 甫 詩 3 百 33
杜甫詩 3百 33Poet. Du Fo :AD. 712ㅡ770中國 唐 나라 詩人.Poet. Du Fo :杜 甫字는 자미(子美), 號는 소릉(少陵)이다. 吳나라 하남(河南) 공현(鞏縣)의 요만(瑤灣)출생이다. 東洋三國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함.현재 約 1600余首(全篇 1,647詩)의 詩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1. 詩人의 삶사실 두보는 하남(河南) 공현(鞏縣)의 요만(瑤灣)에서 712 년 태어났으나, 선대(先代)가 두릉(杜陵)에서 양양으로 옮겨 살았다.『당서(唐書)』는 두보를 양양사람이라 함.그의 먼 조상은 진(晉)나라 때의 학자 두예(杜預)이고, 할아버지는 유명한 시인 두심언(杜審言)이었고, 아버지 두한(杜閑)은 봉천령(奉天令)이란 작은 벼슬을 하였으나, 집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詩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일찍이 각지를 방랑하다 744년 낙양에서 李 白을 만나 李 白, 高 適과 양송(梁宋)을 여행 후에 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황제에게 「천구부(天狗賦)」를 지어 바쳤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長安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唐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했으나
1년 만에 화주[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759년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먹을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의 진주[秦州]·동곡[同谷]를 거쳐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에 정착해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末年에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사천[東四川]의 재주[梓州] ·량주[梁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폐병·당뇨·다리 마비에 귀가 몹시 멀고 오른팔이 마비되는 등의 病苦에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는 成都를 떠나서楊子江을 하행하다 泗川省 동단(東端) 기주[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서 나와, 이후 2년간 호북 ·호남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했는데, 대력 4년(769) 58세가 된 해 1월 악주에서 배를 타고 洞庭湖에서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니다 潭州, 方田驛 碇泊 船上生活타가 대력 5년(770년) 겨울 潭州에서 岳陽 가는 도중 배 안에서 병을 얻어 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船上 병사하였다.
가족은 그의 棺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岳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인 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해 수양산[首陽山]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묘 근처인 祖父 杜審言 묘 옆에다 묻었다.
詩聖 杜甫는 열정적으로 그의 한 平生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치열한 고뇌적 유명 대표시들을 남기고 세계 문학사에 그 이름 두보를 詩聖 杜甫로서 길이 세계에 빛 냈도다 !2.두보시선집杜 甫는 생전에 시인으로서 李 白과 같은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사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詩, 두보시의 眞 가치를 알아 보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杜 甫는 동 시대의 시인 李 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두보의 詩는 이전의 시풍(詩風)을 一大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와 아울러 후대의 시인들에게는 漢詩의 전범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를 '시성(詩聖)'이라한다. 또한 두보의 장편고시(古詩)는 사회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시사(詩史: 시로 표현된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보의시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도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두보의 시를 잘 모르고서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도 행세할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또한 朝鮮國에서 한글 訓民正音이 창제된 뒤 王命으로 杜甫의 시 전체가 번역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두시언해(杜詩諺解)』원제는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전25권)이다. 『두시언해』는 세종 25년(1443)에 착수해 왕명으로 유 윤겸(柳 允謙)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 말로 번역해 38년 만인 성종12년(1481)에 간행하였는데, 두보의 시전편(全篇)인 1,64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52부로 분류 했었다. 송대(宋代)부터 이루어져 청대(淸代)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석서가 출현했다.그 中 자료가치가 가장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책은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로 두시상주가 처음 나온 것은 淸 康熙 32년(1693년)으로 원제목은 ≪두소릉집상주(杜少陵集詳註)≫다. 현재, 통용되는≪두시상주(杜詩詳註)≫는 台灣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1979년 초판 인쇄된 바 있다.本, 杜甫詩 333은 中國詩 중 杜甫詩 절창작품 333 詩로 엄정선별된 그의 詩는 수준 높은 시재, 고뇌, 철학 내포된 漢文學 시세계를 알 수 있노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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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甫詩 333 編纂 參考書籍
杜甫詩百 天上風流人 文學版 2018
杜甫詩二百 天上風流人 MoonPhone 2019中國詩史 陳 明鑑 明倫出版社 1983
中國歷代詩選 丁 嬰 宏業書局有限公司 1978
漢 語 詩 律 學 王 力 商務印書館 1988
杜甫古詩韻讀 馬 重奇 中國展望出版社 1985
3
天上風流人 纂Poet. Po Chu I :白 樂 天 詩 333 選 集
白 居易
字. 樂天
AD. 772ㅡ846
中國 唐 나라 詩人.白 樂天
출 생
백 거이(白 居易, 772년ㅡ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號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등으로 불리었다. 唐나라 때 河南 鄭州 洛陽 부근 新鄭에서 태어났다.
생 애
대력(大曆) 7년(772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신정시(新鄭市)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4형제 중 둘째이며, 첫째는 白幼文, 셋째는 白行簡, 넷째는 白幼美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 때 이미 詩를 짓고, 9세 때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했고, 그 무렵(806년 12월) 지은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詩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서 822년 사이에 통일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 충량(金 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글을 통하여 성현(聖賢)의 도(道)를 실현한다는 전제 아래 문이관도(文以貫道)를 주장했던 당시의 문학사조와 무관하지 않다.
官人으로서의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皇命이 이미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 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鳥窠' 作巢란 별명을 가진 '道林禪師'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口舌 등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衆善奉行 諸惡莫作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해〈백씨육첩 白氏六帖〉30권 및 74세에 자신의 글을 다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白氏長慶集)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 해 생애를 마쳤다.작 품
백거이는 다작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편서사시로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 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120句 840字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장경집>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 <백씨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평생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狂言綺語의 문집인『劉白唱和集 5권』『白氏文集』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狂詠’은 계속되었고 조정의 불교탄압정책 풍자하는 작품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개성(開城) 4년(68세) 겨울에 중풍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향산사(香山寺)의 승려인 여만대사(如滿大師)와 향화사(香火寺)를 짓고 스스로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이듬해 목종(穆宗) 회창 6년(844) 8월에 중풍이 재발해 낙양(洛陽) 이도리(履道里)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다가 詩酒와 彈琴,參禪으로 조용히 一生 마치니 846년 8월,향년 75세였다.
이 밖에 詩文을 짓는 편의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白氏六帖事類集』30권이 있다.현재 전하는 것은『백씨장경집』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백향산시집』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琵琶行』『長恨歌』『太行路』『賣炭翁』『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백 낙천묘<白園>은 河南省 洛陽 南香山 琵琶峯에 있다.
編纂 參考書籍
新山中國詩 333 宋 新 山 文學版 2018白樂天詩 張 基槿 太宗出版社 1981 白樂天 片山哲 著 東京 岩波書店 昭和 31 1959中國詩史 陳 明鑑 明倫出版社 1983中國歷代詩選 丁 嬰 宏業書局有限公司 1978漢 語 詩 律 學 王 力 商務印書館 1988 題
4
소 동파 문학은
낙천적이며 이지적인 시의 세계로 송시(宋詩)의 작풍을 확립한 시인이다. 시 약 2,400수, 사(詞) 300수가 현존한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가 추구한 시 세계의 진면목은 형식에 자유로운 고시(古詩)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송시가 지닌 산문성의 극치를 보여 준다. 또한 절구(絶句)의 자유분방함 분위기로서
본 新山蘇東坡詩千外儒全經에서는
蘇軾詩全集 29권 全詩 원문 수록 소개해 놨도다.
유학 제외
끝.
이상 중국대륙 5대시인 全詩作 總收錄化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