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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山韓愈詩原全

신산 한유시 대표작 359 원전

편집 新山韓愈詩原全 凡 例 新山韓愈詩原全 序 1.次 例 4 2.韓愈詩人 傳 5 3.韓愈詩全 題 6 ㅡ 2 1 4.韓愈詩全 作 22 ㅡ 17 3 5.附 17 4 도서 정보편집 韓愈 한유 (Han Yu) 자(字)는 퇴지. 한문공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편집
新山韓愈詩原全


凡 例

新山韓愈詩原全



1.次 例 4
2.韓愈詩人 傳 5
3.韓愈詩全 題 6 ㅡ 2 1
4.韓愈詩全 作 22 ㅡ 17 3
5.附 17 4

도서 정보편집
韓愈 한유
(Han Yu)

자(字)는 퇴지. 한문공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대학 大學〉·〈중용 中庸〉·〈주역 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 〈원도 原道〉·〈원성 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韓愈(한유.한퇴지. 768-824)

한유{(韓愈,대력(大曆)3년(768년)-장경(長慶)4년(824년)}는 등주(鄧主)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출신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으로 중국 중당(中唐)시대(時代)를 대표하는 유학자(儒學者) 시인(詩人)이며 문장가(文章家), 정치가(政治家), 사상가(思想家)이며 당송(唐宋)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한유(韓愈)는 정원(貞元) 12년(796)에 변주(汴州) 선무군(宣武軍)에서 절도사 동진(董晉)을 따라 관찰추관(觀察推官)으로 부임하여 시인 맹교(孟郊)와 교유하였고, 장적(張籍)과 이고(李翱)가 그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했으며, 동진(董晉)이 죽은 뒤에는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장건봉(張建封) 휘하로 옮겨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다가, 장건봉(張建封)이 죽은 뒤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정원(貞元) 17년(801년)에 국자감(國子監)의 사문박사(四門博士)로 있으며 <사설(師說)>지었고, 정원(貞元) 19년(803년)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을 때 한유는 <어사대상론천한인기장(御史臺上論天旱人饑狀)>을 지어 당시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의 폭정을 규탄했으나 이로 인하여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원화(元和) 6년(811년)에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진학해(進學解)>지었는데 재상 배도(裴度)가 이를 치하하여 그를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임명하였고 원화(元和) 10년(815년)에는 배도를 따라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의 토벌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고 이때 <평회서비(平淮西碑)>를 지었다.

원화(元和)14년(819)에 독실(篤實)한 불교(佛敎) 신자인 당 헌종(憲宗) 황제(皇帝)가 산시 성(陝西省)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의 궁중으로 들여 공양(供養)하고자 할 때 한유(韓愈)는 <불골(佛骨)을 논하는 표(諫迎佛骨表)>을 헌종(憲宗)에게 올리며 과거 양 무제(梁 武帝)의 고사(故事)를 인용(引用)하여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라고 간언(諫言)하자 헌종(憲宗)은 대노(大怒)하여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려 했지만 재상 배도(裴度)와 최군(崔群)의 간언으로 사형을 면하고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左遷)당했다.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卽位)하며 한유(韓愈)는 중앙으로 소환(召喚)되어 국자제주(國子祭酒.대학총장)가 되었고,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경조윤 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직을 역임하였다.
57세로 타계한 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追贈)되었고 송의 원풍(元豐)연간에 창려백(昌黎伯)에 추증(追贈)되었다.

6조(六朝)이래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하게 여기는 변려체(騈儷體)가 문단의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었으나 한유(韓愈)는 수사주의(修辭主義)에 치중(置中)해 있다며 비판(批判)하고, 고문복고운동(古文復古運動)으로 문장(文章)의 자연(自然) 복귀(復歸)등을 주장(主張)했으며, 맹자(孟子)를 아성(亞聖)으로 존칭(尊稱)하는 것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대(漢代)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型式)을 표본으로 하는 고문(古文)을 주장(主張)하여 산문 문체(散文文體)의 개혁(改革)을 이루었고 이를 지지(支持)했던 유종원(柳宗元)은 이후 한유(韓愈)와 함께 <한유(韓柳)>로 병칭(竝稱)되었으며 시(詩)로는 백거이(白居易. 樂天)와 함께 한백(韓白)이라 병칭(竝稱)되었다.

그의 문장(文章)의 특징(特徵)은 고문이론(古文理論)을 문장(文章)을 통하여 잘 실천(實踐)하고 있으며 철저(徹底)하게 육조(六朝) 이래 주류를 이루었던 변려문(騈儷文)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 산구(散句) 형식(型式)의 순수(純粹)한 고문체(古文體)를 따랐으며, 옛 사람들의 언어(言語)에서 간결(簡潔)하고 생동적(生動的)인 새로운 언어(言語)를 만들어 당시의 구어(口語)를 기초(基礎)로 해서 새로운 언어(言語)를 창출(創出)하여 활발(活潑)한 시어(詩語)를 사용하였다.

문장이론(文章理論)은 고문(古文)의 바탕 위에 "문이재도(文以載道)"로 문장(文章)의 내용에 도(道)를 내포(內包)할 것을 역설(力說)하였고 훌륭한 문장(文章)은 작가의 곤궁(困窮)한 형편(形便) 속에서 창작(創作)해 내며, 작가(作家)의 소질(素質)과 근면성(勤勉性)으로 학문(學文)에 집중(執中) 할 수 있는 기회(機會)임을 시사(示唆)하며 불평측명( 不平則鳴)을 주장(主張)하여 작가(作家)로서의 시대적(時代的) 사명(使命)과 작가의 도덕수양(道德修養)과 기(氣)를 강조(强調)하였다.

또한 유학자(儒學者)로서 유교정신(儒敎精神)을 고양(高揚)하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어 유교(儒敎)의 목적(目的)을 인간의 "상생상량(相生相養)"에 두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義)를 지켜 널리 대중(大衆)을 사랑하는 길이 그 목적(目的)이며 유가(儒家)의 도(道)를 실천(實踐)하는 길이라 했다.
이는 요(堯)대와 순(舜)대에 전해지고 맹자(孟子)에게 이어졌지만, 단절(斷絶)되어 석가(釋迦)와 노자(老子)의 사상(思想)에 빠진 것을 한유(韓愈)가 인간성(人間性)에 대한 고찰(考察)을 통하여 명확(明確)히 했다.

한유(韓愈)의 대표적인 작품 중 <오원(五原)>인 <원도(原道)> <원성(原性)> <원훼)原毁> <원인(原人)> <원귀(原鬼)>는 그의 사상을 표출한다.

<원도(原道)>편은 道의 개념을 정리하고 유가(儒家)의 도통확립(道統確立)을 천명하며 이상적 정치이념(政治理念)으로 성인(聖人)의 도(道)를 표방하여 유가수호(儒家守護)와 국가안정(國家安定)을 위한 명분으로 불로배척(佛老排斥)을 주장하였다.

<원성(原性)>편은 한유의 性三品論을 표방하며 공자(孔子)의 "인의사상(仁義思想)"과 맹자(孟子)의 "사덕이론(四德理論)"으로 새로운 성품론(性品論)을 제창하였다. 인간의 본성(本性)을 上中下 세 등급(等級)으로 구분(區分)하였는데, 上下등급은 등급 이동이 불가(不可)하고 中급은 上下로의 이동(異動)이 가능(可能)하다고 하였다.

<원훼(原毁)>편은 시기(猜忌)와 나태(懶怠)는 비방(誹謗)의 원인(原因)으로 도(道)의 부재(不在)로 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불의(不義)한 정치적(政治的) 현실(現實)을 반영(反映)한 작품으로, 바른 인재기용(人才起用)에 대한 요구(要求)를 정치권(政治權)에 제시(提示)하고 있다.

<원인(原人)>편은 인간(人間)은 인간의 영역(領域)인 천지간(天地間)의 주인(主人)이며, 주인의 도리(道理)로 인(仁)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원귀(原鬼)>편은 귀신(鬼神)은 무형(無形) 유형(無聲) 무기(無氣)의 존재(存在)이며 형체(形體)나 소리에 의해 사람들에게 느껴지며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재앙(災殃)을 내리는 존재(存在)로 언급(言及)하며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실천(實踐)할 것을 간접적(間接的)으로 교화(敎化)하고 있다.

한유(韓愈)는 유가사상(儒家思想)의 핵심(核心)을 <오원(五原>중에 체계적(體系的)으로 정리(整理)하여 그의 산문(散文) 작품(作品)과 문학 활동(文學 活動)에 적용(適用)시켰다.
그의 사상적(思想的)인 기반(基盤)이었던 유교(儒敎)의 부흥(復興)과 함께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은 사상(思想的)의 표현(表現) 자유를 목적(目的)으로 하는 복고주의(復古主義)와 결부(結付)되어 추진(推進)되었고 <원인(原人)>,<원도(原道)>,<원성(原性)> 등의 작품은 고문(古文)의 부흥운동(復興運動)의 관점(觀點)에서 썼으며 그의 배불론(排佛論)도 육조(六朝) 시대부터 수당(隋唐) 시기(時期)까지 주류(主流)를 이루던 숭불(崇佛) 경향(傾向)을 배제(排除)하고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유교(儒敎)가 가진 지위(地位)를 회복(回復)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경향(傾向)은 사후(死後) 수제자(首弟子)인 이고(李翱)에게 계승(繼承)되었다.

한유(韓愈)는 논설문(論說文) 서정산문(抒情散文)으로 산문(散文)은 사상성(思想性)과 예술성(藝術性)을 겸비(兼備)한 문장으로 예술적(藝術的)인 가치를 높이는데 공헌(貢獻)했으며, 우언(寓言) 전기(傳記), 서사문(敍事文) 비지(碑誌)등이 뛰어나고 논설문(論說文)인 <논불골표(論佛骨表)> <원도(原道)> <원훼(原毁)><사설(師說)><진학해(進學解)>등 논리(論理)가 정연(整然)하고 문장이 유려(流麗)하다.
우언(寓言) 전기(傳記)인 <모영전(毛潁傳)><송궁문(送窮文)><잡설(雜說)>등은 구성이 새롭고 우의(寓意)가 잘 드러나 있다.
서정산문(抒情散文)인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제정부인문(祭鄭夫人文)>등의 문장은 세밀한 묘사와 정선(精選)된 어휘(語彙)가 강렬한 감동(感動)을 주고 있으며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은 천고(千古)의 제문(祭文)으로 칭송(稱頌)받고 있다.
서사문(敍事文)으로는 <오자왕승복전(圬者王丞福傳)><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을 비롯하여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등이 있으며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40권과 <외집(外集)>10권이 전해지고, 시인으로 새롭고 기이(奇異)한 어구를 많이 쓰는 난해한 시풍으로 통속적이며 평이한 시풍의 백거이(白居易)와 중당(中唐) 시단(詩壇) 한 주류를 형성했으며 맹교(孟郊) 장적(張籍) 이하(李賀) 왕건(王建) 가도(賈島) 등 “한문(韓門)의 弟子”로 통칭(通稱)되는 시인(詩人)들을 배출(輩出)하였다.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文名(문명)이 높았으며 『昌黎先生集(창려선생집)』등의 저작이 남아 있다.

本,
新山韓愈詩原全은
韓愈詩原全 359시를
수록해 소개해 놨다.


끝.
大陸文明君 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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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山詩빛 · 新山詩님 · 新山詩달 外 韓國靑少年文學集 1~8卷 · 新山中國詩 · 新山中國詞 · 新山李白詩 · 新山金笠詩 및
素月詩百 · 金笠詩百 · 新山中國宋詞 · 列聖御製 詩選 · 新山 渤海史考 · 新山天詩經 · 新山李白詩 333 · 新山金笠詩 333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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