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序 3
1.次 例 4
2.韓愈詩全 5 ㅡ 175
3.柳宗元詩全 176 ㅡ 250
4.歐陽修 詩千 251 ㅡ 684
5.蘇洵詩全 685 ㅡ 727
6.蘇東坡詩千 728 ㅡ 1208
7.蘇轍 詩千 1209 ㅡ 1950
8.曾鞏詩全 1951 ㅡ 2142
9.王安石詩千 2143 ㅡ 2678
10.附 2679 ㅡ 2680 11.略 2681。
도서 정보편집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대표시 8505 詩 수록.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하는 말이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騈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나라·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明)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
① 한유(韓愈, 768∼824)
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이다.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그가 쓴 〈원도 原道〉·〈원성 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 당(唐)의 유학자, 문장가. 자는 퇴지(退之), 당시 당나라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보수파의 족벌 호족과 개혁파의 신흥 서족(庶族) 사이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의 문필 활동은 이 당쟁 하에서 전개되었다. 문장가로서 유종원(柳宗元) 등과 고문(古文) 부흥에 힘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② 유종원(柳宗元, 773∼819)
중국 당대의 문학자·철학자이다. 이명은 유하동(柳河東) 자는 자후(子厚). 하동해(河東解:지금의 산시 성 윈청[運城]) 사람이다.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유'(韓柳)라고 병칭된다. 시의 내용은 담백하며, 유배생활을 반영한 작품과 경치를 묘사한 소시(小詩)는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그밖에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유종원의 시는 당송 팔대가로 꼽힐 만큼 두드러진 그의 문장에 가려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사실 그의 시 역시 그의 문장 못지않게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시는 북송(北宋)의 대문호 소식(蘇軾, 1036∼1101)의 높은 평가에 힘입어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소식은 <유자후의 시를 평함(題柳子厚詩)>에서 "유종원의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아래 위응물(韋應物)의 위에 있다. 한유(韓愈)는 호방(豪放)하고 기험(奇險)한 점은 그를 능가하지만 온려(溫麗)하고 유심(幽深)한 점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고담(枯澹)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겉은 메마르면서도 안은 기름지고,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름다운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로, 도연명이나 유자후 같은 사람의 시가 그러하다. 만약 안과 겉이 다 고담하다면 이것 역시 무슨 이야기할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 혜주와 담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도연명과 유종원의 문집을 가장 즐겨 읽으면서 이 두 문집을 '남방 유배의 두 친구(南遷二友)'로 여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유종원의 시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③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구양수는 쓰촨 성 몐양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3세에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에 살고 있던 숙부 구양엽(歐陽曄)의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쓰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집안이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은 뒤, 취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취옹정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050년 남쪽 수도인 허난 성 구이더[貴德]의 자사(刺史)를 거쳐 1054년에는 수도로 소환되어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1057년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의 과거시험에서 고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은 합격시키는 한편, 문학적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 태학체(太學體)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모두 불합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합격된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당송 8대가'로 칭송되는 소식(蘇軾:蘇東坡)·소철(蘇轍) 형제와 증공(曾鞏)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자신의 문학관을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
구양수의 개인적 영향력과 여러 방면에 걸친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가로서는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수는 일찍이 한유의 작품에 심취하여 한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한유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맹자의 글처럼 간결명료한 한유의 고문체 문장을 좋아하여 당시 유행하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운율을 맞춘 태학체 문장을 멀리하고 고문체 문장을 즐겨 썼다. 고문체로 쓰여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산문시인 부(賦)의 형태를 여러 가지 제약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했고, 부와 사(詞)를 비롯한 다른 문학형태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④ 소순(蘇洵, 1009∼1066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현[眉山縣] 출신으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아버지이다. 28세 때 과거에 낙제하자 그때까지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했다. 그결과 6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꿰뚫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가 되었다. 인종(仁宗) 말기에 두 아들인 소동파·소철(蘇轍)을 데리고 상경하여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았다. 구양수가 천자(天子)에게 그의 저서 22편을 바치자 학자들이 입을 모아 그의 글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후 비서성(書省) 교서랑(校書郞), 원안 현[文安縣] 주부(主簿)를 지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북송 이래 예(禮)에 관한 책들을 요벽(姚闢) 등과 함께 편집한 〈태상인혁례 太常因革禮〉 100권이 있다.
⑤ 소식(蘇軾, 1036∼1101)
중국 송왕조의 문호로 길이 칭송받는 인물
“이 분은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하혜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전통 동아시아 역사는 군주들과 이들 선비들이 펼치는 드라마였다고 보아도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선비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선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던 시대는 중국 북송 왕조 시대를 손꼽는다. 범중엄, 구양수, 매요신, 소옹, 왕안석, 사마광, 심괄, 정명도, 정이천, 그리고 남송의 주희, 진덕수 등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이때 나타나 저마다 일가를 이루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다 보면 정치가, 관료, 학자, 도덕가, 문인 등 선비의 여러 가지 성격 중에서 어느 성격이 가장 중요한지의 문제도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런 구분을 넘어 모든 면에서 두루 뛰어났으며, 어떤 한 쪽에 집중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도 있었는데 동파(東坡) 소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식은 여섯 살 때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열 살에 시의 한 형태인 부(賦)를 능숙하게 짓는 등 일찌감치 글재주를 뽐냈다. 어릴 때 밭에서 놀다가 돌덩어리를 캐 왔는데, 그 돌로 벼루를 만드니 질이 아주 좋았다. 그것은 장차 소식이 글로 대성할 징조라고, 아버지 소순은 여겼다고 한다. 19세에 결혼하고, 21세에 동생 소철과 함께 개봉으로 가서 그곳에서 열린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예부에서 주관하던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시험을 주재하던 구양수는 당대 문단의 최고봉이었다. 그가 소식의 답안을 읽고는 놀라서 “이제 이 늙은이의 시대는 가는구나!·····30년이 지나면 아무도 구양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격찬했다고 하며, 최종 관문인 전시(殿試)에서는 인종황제가 “짐의 자손에게 봉사할 재상감을 얻었다”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소식과 소철은 곧바로 관리가 되지는 못했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3년 후, 소식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걸출한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그것을 하나로 엮어 [남행집]이라는 책으로 내었다. 상경한 소식에게는 복창현 주부의 관직이 주어졌으나 그는 동생과 함께 다시 황제 주관의 특별시험을 보아 합격함으로써 봉상부첨판에 임용되었다. 이후 역사를 편수하는 직사관 일을 맡았으나 부인과 아버지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조정은 왕안석과 일부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과 한기, 부필, 문언박, 사마광 등 주로 중진급들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으로 나뉘었다. 소식은 이 중에서 구법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으나, 사마광 등과는 달리 제도개혁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소식이 못 미더워했던 것은 신법 자체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람됨과 태도였다. 가령 왕안석은 얼굴빛이 검어질 정도로 세수나 목욕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재상의 일을 보았는데, 이는 세상사에 초연한 정도를 넘어서 자신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독선, 나아가 ‘청렴한 사람’임을 과시하려는 위선의 냄새가 풍긴다고 보았다.
“옛말에 백 사람의 의견이 전부 다 잘못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법을 반대하는 의견은 백 사람이 아니라 천하 만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폐하는 온 천하를 상대로 고집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결국, 소식은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약 8년 동안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신법당에서는 그에게 부패 누명을 씌우면서까지 아예 제거해 버리려고 했으나, 신종황제는 왕안석을 신임하는 한편 소식의 재주도 아꼈으므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당파싸움에 얼룩진 수도를 떠난 소식은 오히려 홀가분해했다. 시, 서, 화에서 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황정견이나 진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키우기도 했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항주에서는 서호에 제방을 쌓아 아직도 “소씨의 제방(蘇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서주에서는 황하가 범람하여 도시가 잠길 위기를 맞자 군민과 함께 잠도 자지 않고 제방을 보수하여 서주성을 구했다. 관과 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천재지변을 이겨낸 귀한 사례로, 서주 백성들은 “태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자식들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소식을 칭송했다. 1079년 7월, 호주 태수를 지내고 있던 소식은 변경에서 온 어사대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왕안석은 이미 실각해 있었지만, 소식이 소인배들이라고 그토록 멸시했던 신법당 인사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식의 시에 “폐하께 불경스럽거나” “까닭 없이 신법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다며 그의 시 100여 편을 하나하나 따지며 심문했고, 소식의 관련인물도 40명 가까이 잡아들여서 문초했다. 결국 신종이 끝까지 소식을 두둔하고 때마침 태후가 별세하여 중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에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황주에 유배되는 신세가 된다.
⑥ 소철(蘇轍, 1039∼1112)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인이다. 자는 자유(子由).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眉山] 사람이다. 1057년 형 소동파(蘇東坡)와 함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지만 1072년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서(書)를 올렸다가 허난[河南] 유수(留守)로 좌천되었다. 1079년 소동파가 신법에 반대하는 시를 지었다가 조정을 비방한 죄로 탄핵받았을 때, 이것에 연루되어 균주(筠州)의 염주세(鹽酒稅)를 관리하는 하급직으로 밀려났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구법당(舊法黨)이 세력을 얻자 다시 수도로 부름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까지 올랐지만 후에 다시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휘종(徽宗) 때에 대중대부(大中大夫)로 복직되었지만 사직한 뒤 허(許: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쉬창 현[許昌縣])에 별장을 짓고 창작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사상이나 문학 면에서 형과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산문창작에서는 양기(養氣)를 위주로 하여 내적 수양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고,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높이 받들었다. 그의 산문은 소동파만은 못하지만 뛰어나고 담백한 맛이 있다. 〈황주쾌재정기 黃州快哉亭記〉·〈무창구곡정기 武昌九曲亭記〉 등은 송대 산문 가운데 명작으로 꼽힌다. 장시(長詩)에도 능숙하며 그의 시는 비교적 질박·온후하고 수식이 적으며 의경(意境)이 심원하고 언어가 청아하다. 그가 이백(李白)의 시에 대해 "화려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비평한 것을 보면, 시를 지을 때 그가 추구한 바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춘추집해 春秋集解〉·〈노자해 老子解〉·〈고사 古史〉·〈난성집 欒城集〉 등의 저작이 있다.
⑦ 증공(曾鞏, 1019∼1083)
증공(曾鞏)은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건창군(建昌郡) 남풍현(南豊縣: 지금의 강서성 남풍현)에서 아버지 역점(易占)과 어머니 오씨(吳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역치요(易致堯)는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郞中)을 지냈고, 부친 역점은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냈다. 이렇듯 전통적인 유가집안에서 태어난 증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20세 후에는 학문적 재능이 출중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구양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도덕적인 문장은 구양수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항상 "구증(歐曾)"이라 칭하였다.
증공은 소년시절부터 왕안석(王安石)과 친밀하였기에 그가 구양수의 문하에 들어간 후에는 왕안석을 구양수에게 추천하기도 하였다.
원풍(元豊) 4년(1081, 63세)에 조정에서는 증공의 사학(史學)을 높이 인정하고 그를 사관수찬(史官修纂)에 임명하여 태조(太祖)에서 영종(英宗)에 이르는 오조국사(五朝國史)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64세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가 그해 9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강녕(江寧)으로 돌아갔다. 이듬해(1083) 4월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시호는 문정(文定)이라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남풍선생(南豊先生)이라 칭하였다.
《송사(宋史)》 「본전(本傳)」에 의하면 증공의 저작으로 《원풍유고(元豊類稿)》50권, 《속원풍유고(續元豊類稿)》4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그러나 송대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는 단지 《원풍유고》의 기록만 있는 것으로 보아 송이 남도한 후에 이미 《속원풍유고》와 《외집》은 산실된 듯하다. 이외에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것으로 《증남풍선생문수(曾南豊先生文粹)》10권, 《증남풍자고선생집(曾南豊子固先生集)》34권, 《증문정공전집(曾文定公全集)》20권이 있다. 증공의 사서(史書)로 송대의 태조에서부터 영종에 이르는 오조(五朝)의 일을 기록한 《융평집(隆平集)》이 전하는데, 이것이 증공의 작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내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혈기는 더욱 쇠약해져 질병으로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학문에 쏟아 고인의 말씀과 뜻을 구하여 좁은 방안에서 스스로 즐거워하였지 빈천 속에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元豊類稿》卷16 〈與杜相公書〉: 鞏年齡益長, 血氣益衰, 疾病人事, 不得以休. 然用心於載籍之文, 以求古人之緖言餘旨, 以自樂於環堵之內, 而不流於貧賤之中.)"
이것은 증공이 힘을 다하여 "문이명도"를 몸소 실천한 증거이다. 이 "문이명도(文以明道)"의 문학관은 항상 문장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해야 하는 것(當理)"으로 나타난다.
증공은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음유(陰柔)"의 미(美)를 체현하였다. 예를 들면, 〈기구양사인서(寄歐陽舍人書)〉는 감사의 편지이지만, 처음부터 공허한 감사의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묘지명(墓地銘)과 역사의 차이점으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묘지명을 쓰는 어려움을 지적한 후에 제일 마지막에 감사의 뜻을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남송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는 〈남풍선생연보서(南豊先生年譜序)〉에서, "나는 증씨의 글을 보고 일찍이 책을 덮고 세상에서 공을 잘 알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予讀曾氏書, 未嘗不掩卷廢書而嘆, 何世之知公淺也.)" "공의 문장은 뛰어나구나. 맹자와 한유 이래로 작자는 많았지만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없었다.(蓋公之文高矣. 自孟韓子以來, 作者之盛, 未有至於斯.)"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증공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송대 성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증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남송의 성리학자 이후에도 명대의 당송파(唐宋派), 청대의 동성파(桐城派)로 이어졌다.
⑧왕안석(王安石, 1021년 12월 18일~1086년 5월 21일)
王安石은 송나라 때 개혁정치를 주장한 개혁 정치가이다.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북송 시기에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그는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 신법(新法)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했지만, 당쟁은 격화하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보수파는 그의 개혁 정치를 매도했지만, 그 문장력은 동료와 정적 모두 인정할 만큼 뛰어났다. 그는 당송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왕안석은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후 20여 년간 화남(華南)에서 지방관으로 종환(從宦)했다. 19세 젊은 황제 신종(神宗)은 즉위하고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안석을 취신(取信)했다. 1069년 왕안석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자리를 계기로 다양한 개혁정책을 실행한다. 장시성 출신인 그는 정치상으로는 신법당(新法黨)에 속해 한기(韓琦)·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 인물을 축출하고 이재에 능한 강남 출신 신진 관료를 대거 거일하여 신법을 과감히 추진한다.
왕안석의 개혁정책
정치 개혁안이 담긴 만언서를 인종에게 올린 바가 있었지만 왕안석은 19세의 젊은 신종 황제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그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으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책은 1069년에서 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대상인과 대지주의 횡포를 막아 중소의 농민과 상인을 보호하여 세수를 늘리고 관료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강화를 목적하였다. 그가 부국강병책으로 제시한 정책은 청묘법, 균수법, 보갑법 정책이다.
개혁의 전모
부국강병과 인재양성을 목표로 내세웠던 신법(新法)을 실현코자 많은 파란을 겪었던 그는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종산(鐘山)에서 여생을 보냈다.
학자며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구양수(歐陽修)를 스승으로 하여 명석하고 박력 있는 문체를 만들어 냈다. 문장의 대가가 되어 당· 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치기도 한다.
자연을 읊은 시가 특히 우수하며, 유교와 불교의 경학에도 밝았다. 불교에 심취해 많은 경전 열람하고 당대의 고승대덕들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종산에 묻혀 살 때 지은 작 鐘山卽事는 자연시로 고요한 자연 속에 선(禪)의 경지가 은근히 피어나는 선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시다.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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