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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山三蘇詩集原全

신산삼소시인 4548 대표시선집

新山三蘇詩集原全 八節灘, 又欲往釣七里瀨.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凡 例 新山三蘇詩集原全 序 3 1.次 例 4 2.蘇洵詩全 5 ㅡ 49 3.蘇軾詩全 50 ㅡ 530 4.蘇轍詩全 531 ㅡ 1272 5.附 1273 ㅡ 1274 6.略 1275。 도서 정보편집 新山三蘇詩集原全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삼부자!!!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蘇洵詩全 68 首 .蘇軾詩全 2263 首 .蘇轍詩全 2217首 合 4548 詩 원문 다 수록해 놨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대표시 8505 詩 수록.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
新山三蘇詩集原全


八節灘, 又欲往釣七里瀨.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凡 例
新山三蘇詩集原全 序 3
1.次 例 4
2.蘇洵詩全 5 ㅡ 49
3.蘇軾詩全 50 ㅡ 530
4.蘇轍詩全 531 ㅡ 1272

5.附 1273 ㅡ 1274
6.略 1275。
도서 정보편집
新山三蘇詩集原全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삼부자!!!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蘇洵詩全 68 首
.蘇軾詩全 2263 首
.蘇轍詩全 2217首

合 4548 詩 원문 다 수록해 놨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新山唐宋八大家詩原全

대표시 8505 詩 수록.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하는 말이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騈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나라·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明)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



④ 소순(蘇洵, 1009∼1066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현[眉山縣] 출신으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아버지이다. 28세 때 과거에 낙제하자 그때까지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했다. 그결과 6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꿰뚫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가 되었다. 인종(仁宗) 말기에 두 아들인 소동파·소철(蘇轍)을 데리고 상경하여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았다. 구양수가 천자(天子)에게 그의 저서 22편을 바치자 학자들이 입을 모아 그의 글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후 비서성(書省) 교서랑(校書郞), 원안 현[文安縣] 주부(主簿)를 지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북송 이래 예(禮)에 관한 책들을 요벽(姚闢) 등과 함께 편집한 〈태상인혁례 太常因革禮〉 100권이 있다.

⑤ 소식(蘇軾, 1036∼1101)

 중국 송왕조의 문호로 길이 칭송받는 인물
“이 분은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하혜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전통 동아시아 역사는 군주들과 이들 선비들이 펼치는 드라마였다고 보아도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선비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선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던 시대는 중국 북송 왕조 시대를 손꼽는다. 범중엄, 구양수, 매요신, 소옹, 왕안석, 사마광, 심괄, 정명도, 정이천, 그리고 남송의 주희, 진덕수 등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이때 나타나 저마다 일가를 이루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다 보면 정치가, 관료, 학자, 도덕가, 문인 등 선비의 여러 가지 성격 중에서 어느 성격이 가장 중요한지의 문제도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런 구분을 넘어 모든 면에서 두루 뛰어났으며, 어떤 한 쪽에 집중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도 있었는데 동파(東坡) 소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식은 여섯 살 때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열 살에 시의 한 형태인 부(賦)를 능숙하게 짓는 등 일찌감치 글재주를 뽐냈다. 어릴 때 밭에서 놀다가 돌덩어리를 캐 왔는데, 그 돌로 벼루를 만드니 질이 아주 좋았다. 그것은 장차 소식이 글로 대성할 징조라고, 아버지 소순은 여겼다고 한다. 19세에 결혼하고, 21세에 동생 소철과 함께 개봉으로 가서 그곳에서 열린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예부에서 주관하던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시험을 주재하던 구양수는 당대 문단의 최고봉이었다. 그가 소식의 답안을 읽고는 놀라서 “이제 이 늙은이의 시대는 가는구나!·····30년이 지나면 아무도 구양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격찬했다고 하며, 최종 관문인 전시(殿試)에서는 인종황제가 “짐의 자손에게 봉사할 재상감을 얻었다”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소식과 소철은 곧바로 관리가 되지는 못했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3년 후, 소식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걸출한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그것을 하나로 엮어 [남행집]이라는 책으로 내었다. 상경한 소식에게는 복창현 주부의 관직이 주어졌으나 그는 동생과 함께 다시 황제 주관의 특별시험을 보아 합격함으로써 봉상부첨판에 임용되었다. 이후 역사를 편수하는 직사관 일을 맡았으나 부인과 아버지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조정은 왕안석과 일부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과 한기, 부필, 문언박, 사마광 등 주로 중진급들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으로 나뉘었다. 소식은 이 중에서 구법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으나, 사마광 등과는 달리 제도개혁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소식이 못 미더워했던 것은 신법 자체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람됨과 태도였다. 가령 왕안석은 얼굴빛이 검어질 정도로 세수나 목욕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재상의 일을 보았는데, 이는 세상사에 초연한 정도를 넘어서 자신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독선, 나아가 ‘청렴한 사람’임을 과시하려는 위선의 냄새가 풍긴다고 보았다.
“옛말에 백 사람의 의견이 전부 다 잘못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법을 반대하는 의견은 백 사람이 아니라 천하 만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폐하는 온 천하를 상대로 고집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결국, 소식은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약 8년 동안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신법당에서는 그에게 부패 누명을 씌우면서까지 아예 제거해 버리려고 했으나, 신종황제는 왕안석을 신임하는 한편 소식의 재주도 아꼈으므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당파싸움에 얼룩진 수도를 떠난 소식은 오히려 홀가분해했다. 시, 서, 화에서 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황정견이나 진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키우기도 했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항주에서는 서호에 제방을 쌓아 아직도 “소씨의 제방(蘇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서주에서는 황하가 범람하여 도시가 잠길 위기를 맞자 군민과 함께 잠도 자지 않고 제방을 보수하여 서주성을 구했다. 관과 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천재지변을 이겨낸 귀한 사례로, 서주 백성들은 “태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자식들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소식을 칭송했다. 1079년 7월, 호주 태수를 지내고 있던 소식은 변경에서 온 어사대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왕안석은 이미 실각해 있었지만, 소식이 소인배들이라고 그토록 멸시했던 신법당 인사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식의 시에 “폐하께 불경스럽거나” “까닭 없이 신법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다며 그의 시 100여 편을 하나하나 따지며 심문했고, 소식의 관련인물도 40명 가까이 잡아들여서 문초했다. 결국 신종이 끝까지 소식을 두둔하고 때마침 태후가 별세하여 중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에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황주에 유배되는 신세가 된다.
⑥ 소철(蘇轍, 1039∼1112)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인이다. 자는 자유(子由).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眉山] 사람이다. 1057년 형 소동파(蘇東坡)와 함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지만 1072년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서(書)를 올렸다가 허난[河南] 유수(留守)로 좌천되었다. 1079년 소동파가 신법에 반대하는 시를 지었다가 조정을 비방한 죄로 탄핵받았을 때, 이것에 연루되어 균주(筠州)의 염주세(鹽酒稅)를 관리하는 하급직으로 밀려났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구법당(舊法黨)이 세력을 얻자 다시 수도로 부름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까지 올랐지만 후에 다시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휘종(徽宗) 때에 대중대부(大中大夫)로 복직되었지만 사직한 뒤 허(許: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쉬창 현[許昌縣])에 별장을 짓고 창작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사상이나 문학 면에서 형과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산문창작에서는 양기(養氣)를 위주로 하여 내적 수양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고,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높이 받들었다. 그의 산문은 소동파만은 못하지만 뛰어나고 담백한 맛이 있다. 〈황주쾌재정기 黃州快哉亭記〉·〈무창구곡정기 武昌九曲亭記〉 등은 송대 산문 가운데 명작으로 꼽힌다. 장시(長詩)에도 능숙하며 그의 시는 비교적 질박·온후하고 수식이 적으며 의경(意境)이 심원하고 언어가 청아하다. 그가 이백(李白)의 시에 대해 "화려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비평한 것을 보면, 시를 지을 때 그가 추구한 바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춘추집해 春秋集解〉·〈노자해 老子解〉·〈고사 古史〉·〈난성집 欒城集〉 등의 저작이 있다.



이상


끝.
大陸文明君 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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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山詩빛 · 新山詩님 · 新山詩달 外 韓國靑少年文學集 1~8卷 · 新山中國詩 · 新山中國詞 · 新山李白詩 · 新山金笠詩 및
素月詩百 · 金笠詩百 · 新山中國宋詞 · 列聖御製 詩選 · 新山 渤海史考 · 新山天詩經 · 新山李白詩 333 · 新山金笠詩 333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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