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
李 白 詩 333 次 7 序 8 ㅡ 11 題 12 ㅡ 24 詩 25 ㅡ 650 畵 651 ㅡ 653 金 笠 詩 333 次 654 序 655 ㅡ 662 題 663 ㅡ 676 詩 677 ㅡ 1142 附 1143 ㅡ 1147
朝 中 兩大詩人 名詩集
朝 中 大陸 2大詩人 詩全
.李白詩千
.金笠詩全
略
1.李白詩全 333
2.金笠詩全 333
1
序Poet. Li Bek :李白詩 3百 33
李 白 이 백
AD. 701ㅡ762
中國 唐나라 詩人.
字는 태백(太白), 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촉나라 쓰촨 성 출생이다. 東洋 三國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서 시선(詩仙)이라 함.
현재, 약 1100여 수의 詩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1. 詩人의 삶
본래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서,
중앙아시아 교역하는 무역상인 부친과 살아 이백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이다.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땅에 체류한 적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한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의 개방성은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다가 젊어서는 한때 도교(道敎)에 심취했는데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며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였다.
그의 詩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山中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실현을 기대했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2. 人生 文學期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評한 하 지장(賀 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과대적 방약무인한 태도와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다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미움을 받아, 44세에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사직하고는 창안(長安)을 떠나게 되었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李 白은 맹호연(孟 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杜 甫)등 많은 시인과 교류했고 특히 말년 장안떠난 이후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 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서 헤어진 뒤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당대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62세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 양빙(李 陽氷)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盛唐 대표 시인 이백의 시는 신선(神仙)과 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바, 李白詩風은 젊은 시절은 협기, 만년은 신선, 전생애는 술이 바로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곧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李白詩는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才,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 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다,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3.李 太白 시집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이후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고,
서유럽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1862년 《당 시대의 시들》(Poesies de l'Epoque des Thang)이다. 영어권에는 허버트 앨런 길레스가 1901년 중국 문학사를 펴며 처음 실렸다.
자유로우며 시적으로 영향력 있던 번역작은 에즈라 파운드가 日本語 번역된 이 태백 시를 重譯한 것이다.
2
天上風流人 纂
金 笠 詩 333
序
Poet Kim Lip
金 笠 김 립
: 1807ㅡ1863
1. 詩人의 삶
風流詩仙, 放浪詩人.
본명 김 병연(金 炳淵). 본관 安東. 字는 성심(性深) ;
號는 蘭皐로 일명 '김 삿갓', 金 笠, 金 大笠, 金莎笠, 金籉笠, 金 鑾, 芷裳 等.
朝鮮 後期 1807년 경기도 양주땅, 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에서 양반 가문인 김 안근(金 安根)의 3男 中 次男으로 出生化.
金 笠 先代祖上 살펴보면 9대조부는 丙子胡亂때 斥和大臣으로 유명한 淸陰 金 尙憲의 四寸兄인 刑曹參判을 지낸 김 상준이며, 5대조부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 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 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 이환이다.
5세 때에 조부 김 익순(金 益淳)이 1811年 朝鮮 東北部 咸慶道 함흥지방 洪 景來 亂 당시 宣川府事로 있다가 反亂暴徒들이 宣川府 到達時 김 익순은 大醉 밤잠에 빠져 있다가 農民軍에게 항복한 職務怠漫罪로 慘刑을 當하고 滅門廢族의 집안이 됐다.
約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영리해서 글재주 특히,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6세이후 그는 下人 김 성수(金 聖洙)의 구원을 받아 兄 병하(炳河)와 함께 黃海道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살았다.
2. 人生 流浪記
金 炳淵이 20세 되던 해인 1827년 寧越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祖父 김 익순(金 益淳)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바, 그는 祖父 김 익순(金 益淳)의 죄상을 批難하는 글 ;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을 짓고서 壯元及第後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숨겨왔던 집안 내력을 듣자 不忠 逆賊子孫이라는 것과 祖父批判詩를 지어 賞을 탄 自身 罪 決코 용서할 수가 없어 一平生 不望靑天 不孝子孫 罪業懺悔次, 곧 22세 때 출가한 후 쭉 삿갓을 쓰고 朝鮮全國 平生流浪하며 다니다가 1863年 享年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路上客死한 것을
現,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다 그의 아들 익균(翼均)이 生前遺言擇地한 와석골 노루목에다 詩仙 김 삿갓 山所 모시다.
1863년(철종 14)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同福)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는데 그 후에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安 進士 집에 되돌아와 恨 많은 風流詩人 一生 마쳤다고 하는데,
臨終時는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昌原 丁氏 사랑채 終命家에서 사망했는데, 그나마 거지 꼴이 아닌 잘 알던 이 집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도 뭔가 가련한 느낌을 준다.
" 安 초시(자기 마지막을 돌보던 인물) 춥구려. 이제 잠을 자야겠으니 불을 꺼주시오…."
그 뒤 “ 어머니가 보고 싶소” 라 말한 후 임종했다고 傳한다. 김 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사시는 마을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 번 했다고 傳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대동기문 大東奇聞≫, ≪대동시선 大東詩選≫, ≪조야시선 朝野詩選≫ 等에 단편적으로나마 남아있다.
金 笠 文 獻 等
金 笠 : 金 炳淵에 관하여 알려진 문헌들로는, 해동시선(海東詩選),대동시선(大東詩選),대동기문(大東奇聞),녹차집(綠此集),해장집(海藏集)등이 있다.
이 중에 해동시선은 그의 입금강(入金剛)이란 시를 게재하고 있으며, 대동시선은 영립(詠笠)이란 시를 싣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서적은 모두 그에 관한 전기를 기록하고 있고, 특히 신 석우의 해장집 만이 대체로 상세한 김 병연의 전기와 문학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겠다.
□ 참고서적
宋 新山 著 金笠詩百 BOOKK 2018
黃 憲植 編 김 삿갓 詩集 한빛문화사 1983
李 應洙 著 金笠詩集 한성도서株 1941
朴 午陽 編 金笠詩集 文 苑 社 1948
李 圭瑢 輯 海東詩選 滙洞書館 1917
정 대구 著 김 삿갓 연구 문학아카데미 1990
李 丙斗 譯 韓國歷代名詩全 文獻編纂會 1959.
< 以 上 >
朝 中 3 大詩人千詩集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