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宋詩
四百大全
宋詩論
수천년 중국 시의 역사에서 당시는 특유의 미학적 찬란함과 독창성으로 '고전 시가의 꽃'으로 평가 받았다. 사랑과 이별,아름다운 자연, 인생의 낭만과 회한 등 인간의 희로애락을 잔잔하게 전해주는 시를 볼 수 있다. 당시가 당대의 문화와 사회를 기본적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당시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면 :
당시와 더불어 중국 문학의 최고봉이라 꼽히는 송시는 아름답고 멋진 풍류보다는 시대의 아픔과 사회적 문제의식,생활의 발견 등 깊이 있고 세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구양수, 소숭흠, 소식, 왕안석 등의 시인들의 송시를 볼 수 있다.
송대의 시인들 대부분의 삶 자체가 정치적 좌절과 득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이 투영된 작품 세계가 담담하면서도 소리 없이 작품에 숨어있다.
解題(해제)
北宋(북송)
北宋(북송)의 詩壇(시단)을 四期(사기)로 나누어 생각한다.
第一期(제일기: 960~997)는 太祖(태조)와 太宗(태종)의 시대를 합한 약 40년.
이른바 宋朝(송조) 건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려한 시대이다. 前朝(전조)의 遺臣(유신)도 포용되어 있어서, 관료가 문화의 주축인 이상 자연이 시단도 전조의 遺風(유풍)을 그대로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五代(오대) 세상에서 존경받던 시인은 唐(당)의 白居易(백거이) 엇음으로 國初(국초)의 시단은 우선 白體(백체)의 시가 風痱(풍비)한다.
전조 유신이며 당시 詩名(시명)이 있었던 사람은 徐鉉(서현) 徐鍇(서개)의 형제와 李昉(이방)이다. 모두가 고관이며 각각 白體(백체)의 시를 지었으나 실재 시단의 중심이 된 것은 젊고 순수한 宋人(송인)인 王禹偁(왕우칭)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白(백)에 가까운 시를 지었다.
第二期(제이기: 998~1022)는 眞宗(진종)의 시대이다.
바로 西崑(서곤)의 전성기이다. 西崑(서곤)의 이름은 이 파의 중심인물이었던 楊億(양억)이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 지은 시를 모아, 眞宗(진종) 景德(경덕) 원년(1004)에 西崑酬唱集(서곤수창집)이란 이름을붙혀 서문을 슨 것으로서 비롯되었는데, 西崑(서곤)이란 중국 신화 가운데, 서방 崑崙山(곤륜산) 위에 있는 神帝(신제)의 도서관을 말 한다. 거기 수록된 시인은 楊億(양억)을 비롯하여 모두 17명.그들의 관직과 지위는 다음과 같다.
楊億(양억) 工部侍郞(공부시랑)
錢惟演(전유연) 翰林學士(한림학사)
陳越(진월) 著作佐郞(저작좌랑)直史館(직사관)
劉隲(유척) 工部員外郞(공부원외랑) 直集賢院(직집현원)
刁衍(조연) 駕部員外郞(가부원외랑) 直秘閣(직비각)
張詠(장영) 樞密(추밀)直學士(직학사)
任隨(임수)
晁逈(조형) 翰林學士(한림학사)
薛映(설영) 右諫議大夫(우간의대부)
劉筠(유균) 左正言(좌정언)直史館(직사관) 翰林學士(한림학사)
李宗諤(이종악) 翰林學士(한림학사)
李維(이유) 秘書郞(비서랑)集賢殿(집현전)敎理(교리)
丁謂(정위) 同中書(동중서)門下平章事(문하평장사)
元闕(원궐)
錢惟濟(전유제) 直秘閣(직비각) 翰林學士(한림학사)
舒雅(서아) 秘閣校理(비각교리)
崔遵度(최준도) 著作佐郞(저작좌랑) 博士(박사)
그리하여 거기 수록된 시는 五七言律詩(오칠언율시) 뿐이고 247장이다. 모두가 唱酬(창수) 작이며, 排律(배율) 30운에 이르는 것도 있고, 그것들이 모두 현란한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唯美(유미) 시인 집단은 그들이 모두 고급관리였기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은 宋(송) 건국사업이 성공해서 안정기에 점차 들어갔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飽食暖衣(포식난의)의 궁정시인들과 상대해서 당시 하급관리와 隱士(은사) 僧侶(승려)들이 晩唐派(만당파)라 하는 별도의 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寇準(구준)이며, 寇準(구준)은 오래도록 재상이었고, 西崑(서곤)의 무리 이상으로 높은 대관이 이었으나, 홀로 艶縟(염욕)의 시를 싫어해서, 詩僧(시승)들과 교분을 갖고 그 시는 풍격이 높다고 하며, 자연히 이 파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에 또 다른 집단은 潘閬(반랑)과 야인인 林逋(임포), 魏野(위야), 惠崇(혜숭)등 승려의 시인 무리이며 그들은 별도로 기취를 들고 단결한 것은 아니고 다만 공통된 시풍으로 晩唐派(만당파)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긴 것이다.
潘閬(반랑)의 시는 속기가 없다고 평가되고, 林逋(임포)는 詠梅(영매)의 시가 유명하다. 魏野(위야)도 白衣(백의) 紗帽(사모) 賦詩(부시)로 일생을 보낸 隱士(은사)이다. 惠崇(혜숭)은 國初(국초) 九僧(구승)의 한 사람인 詩僧(시승)으로, 그들 시인들에 공통된 점은 모두 煙霞(연하)의 기운 을 띠고, 形式短小(형식단소)하며 五律(오율)이 많고 寫景(사경)을 응집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西崑(서곤)과는 달리 故事(고사)의 인용을 기피했다.
그래서 晩唐(만당)에는 句(구)는 있어도 篇(편)은 없다, 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第三期(제삼기: 1023~1067) 주로 仁宗(인종)의 치세에
들어가면 여기 비로소 宋詩(송시)의 결정적 성격을 주는 歐陽(구양) 蘇(소) 梅(매)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 막간에 나티 난 사람이 石介(석개)이며 그는 怪說(괴설)을 써서 「楊億(양억)은 천하의 사람을 잠님으로 만들고, 귀머거리를 시켜 자기 마음대로 만든 예술을 강요하려는 괴물이다.」라고 심한 욕설을 하며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柳開(유개)등의 古文(고문)운동이 일어나 梅堯臣(매요신), 蘇舜欽(소순흠)을 전위로 한 歐陽修(구양수)가 시단의 주축이 된다.
梅(매)의 시는 호방을 잘 나타냈고, 蘇(소)의 시는 閑談(한담)을 특색으로 하는데, 歐陽修(구양수)는 복고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기교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여, 宋詩(송시)의 새로운 세상을 개척, 여기서 비로소 宋詩(송시)는 송시다운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歐陽修(구양수)의 송 시단에 있어서의 공적은 이와 같이 자신의 시의 개척에만 그치지 않고, 그 높은 관료적 지위를 배경으로 梅(매) 蘇(소)는 물론이고 다음 대 시단의 상대였던 王安石(왕안석)과 蘇軾(소식)등을 추천 발굴한 것에도 공이 이었다.
第四期(제사기: 1068~1126)은 神宗(신종) 즉위에서 汴京(변경) 함락까지 약 50여 년간, 北宋(북송) 시단이 가장 빛나던 시대이다.
宋(송) 제일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東坡(동파) 蘇軾(소식)이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고, 그보다 조금 빨리 이색 정치가 王安石(왕안석)이 뛰어난 시를 남긴 것도 이 시기 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黃庭堅(황정견)을 비롯하여 秦觀(진관), 秦師道(진사도), 晁補之(조보지), 張來(장래)등 소위 蘇門(소문) 학사군자들이 다투어 활동한 것도 이 시기로서, 이른바 宋詩(송시)의 전성기였다.
王安石(왕안석)의 전 반생은 강렬한 성격을 반영하는 시를 남기고 있으나, 그것은 第三期(제삼기) 중에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좌절한 뒤인 이 期(기)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도 원숙해서 그 七言絶句(칠언절구)에는 특히 우아한 명품이 많이 있다.
이에 이어 蘇軾(소식)은 그 파란 많은 인생은 가련하나, 그렇기에 그것이 도리어 그의 詩魂(시혼)을 기를 수가 있게 되어 奔放(분방)하고 豁達(활달)한 성격과 함께, 세의 세계를 넓혀, 표현과 가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고, 天衣無縫(천의무봉)에, 혹은 議論(의론)에, 혹은 敍事(서사)에, 또는 戱弄(희롱)에, 자유자재로 시를 읊어서 충분하게 宋代(송대) 제일의 시인으로서 관록을 나타냈다.
南宋(남송)의 陸游(육유)와 함께 蘇陸(소육)이라 일컬어지며, 그 詩境(시경)의 넓이와 호방함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며, 또한 포용력이 풍부해서 뛰어난 많은 시인들을 자기 신변에 불러들여, 그 들 각각 성격에 맞는 詩境(시경)을 개척시켰는데 이런 점에서는 이태백, 두보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韓愈(한유)도 따르지 못한다. 심한 朋黨(붕당) 와중에 인물이었으나 여러 번 政敵(정적) 王安石(왕안석)을 방문하는 등 마음 흐뭇한 접도 있다.
蘇門(소문) 제일의 시인 黃庭堅(황정견)은 뒤에 江西(강서) 詩派(시파)의 조종으로 추앙받고, 시단에 끼친 영향은 蘇軾(소식)보다 더 크다.
蘇門(소문)의 學士君子(학사군자)에는 秦觀(진관), 晁補之(조보지), 張來(장래) 및 秦師道(진사도)등이 있다. 이렇게 蘇門(소문) 사람들이 일세를 風痱(풍비)한 시기에도, 또 다른 이색시인이 없지는 않았다.
唐庚(당경)은 蘇軾(소식)과 동향이면서도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지조 있는 생활을 하면서, 그의 시는 精緻(정치)하였다.
謝簻(사과)는 형 謝逸(사일)과 함께 呂希哲(여희철)에게 배워 청결한 삶을 살았으나 시는 西江(서강)파에 속하고, 馬存(마존)은 徐積(서적)에게 배워 시루에 흐름이 r아하고 그의 시는 古文眞寶(고문진보)에 수록되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가장 다른 것은 米芾(미불)이며 그의 명필로 유명해서 그 명성으로 詩(시)를 말하는 자가 적으나 결코 그의 시는 당시의 시인에 비해 뒤지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이 시기는 蘇軾(소식)을 중심으로 많은 시인들이 물일 듯 일어나 각각 자기 개성과 환경에 따라 그 詩魂(시혼)을 갈고 닦아 그야말로 百花(백화) 漫瀾(만란) 하였으며, 또한 그 모두가 名花(명화)였다는 시대로, 宋詩(송시)의 宋詩(송시)다운 기초는 모두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다. 宋 政治史로는 정치는 붕당의 다툼으로 계속 혼탁 하였으며, 그 격동이 신인생활에 고통을 주면서도, 또한 시인을 단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평화로운 西崑(서곤)의 시대와 비교하면, 정신의 은총은 오히려 더 두터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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