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訓民正音 龍飛御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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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總 論 6
1. 訓民正音 18
2. 龍飛御天歌 50
3. 訓民正音 解例篇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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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民正音
1443년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 28자를 만들었는데 4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24자가 쓰이고 있다.
창제 동기는 〈훈민정음〉 서문에 나타난 자주, 애민 실용이다. 자음을 어금닛소리·혓소리·입술소리·잇소리·목소리의 5가지로 나누고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그 세기에 따라 획을 더했다. 모음은 천지인의 세 가지(·, ㅡ, ㅣ)를 기본으로 이를 조합하여 모음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에는 이외 글자들의 운용 원리도 담겨있다.
한글은 정음, 언문, 반절 등으로 불렸으나 19세기 말에 국문이라 불리게 되었고 1910년대부터 한글이라 했다.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한글과 민족문화
개요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한국사람은 제 말을 중국글자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방법은 매우 어색하고 복잡해서 〈훈민정음〉 끝에 붙인 정인지의 글처럼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통달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말을 바르게, 반듯이, 옳게 적을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는 한국사람은 제 말을 자유로이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문에 억눌렸던 한국의 민족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할 밑거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참된 한국문학의 출발
한글 창제 이전에도 한국에는 문학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한문으로 되었거나, 한자를 빌어 한국말을 적어서 그때의 소리로 돌이키기 어려운 작품들이므로, '참된 한국문학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용비어천가〉(1445)·〈석보상절〉(1447)·〈월인천강지곡〉(1449)과 같은 작품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니, 이것들은 참된 한국문학활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한글맞춤법의 효시
〈석보상절〉의 맞춤법은 원칙적으로 여덟 받침(ㄱ, ㄴ, ㄷ, ㄹ, ㅁ, ㅂ, ㅅ, 이미지)을 쓴 '소리대로 적기'이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에서는 여덟 받침 이외의 'ㅈ, ㅊ, ㅍ'과 같은 받침이 쓰여서, 형태소의 원형을 지키는 지금 맞춤법의 싹이 보인다. 그러나 형태소를 나누어적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월인천강지곡〉에 있어서는 원형 지키기와 형태소 나누어적기가 다 지켜져 지금 맞춤법에 한걸음 더 가깝다.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맞춤법은 〈월인천강지곡〉에서 그 싹이 텄던 것이다.
한문책의 번역
15세기 후반에는 문학작품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한문책을 옮기는 일에 더 큰 힘을 기울였다.
1460년대에는 많은 불교 경전이 번역되어 나오고, 15세기말에는 민중교화를 위한 수신서가 옮겨졌다. 또 1481년에는 중국의 시인 두보의 작품이 한글로 옮겨졌다. 16세기에는 유교의 경서와 수신서, 농업·양잠에 관한 한문책들이 한글로 옮겨졌다.
옛 노래의 정착
1493년에 찬정된 〈악학궤범〉에는 〈동동〉·〈정읍사〉·〈정과정〉·〈처용가〉 등 이전의 노래가 한글로 정착되었다.
한자 소리 적기
한자의 소리는 뜻글자인 한자로써 풀이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한글은 간단하게 그 소리를 적어낼 수 있다. 〈동국정운 東國正韻〉(1447)은 조선 한자음을 한글로 적은 것이고, 〈홍무정운 역훈 洪武正韻譯訓〉(1455)은 중국 소리를 한글로 적은 것이다. 1527년 최세진은 〈훈몽자회 訓蒙字會〉를 지어 한자의 뜻과 새김을 한글로 적었고, 〈사성통해 四聲通解〉(1517)에서는 당시의 중국소리의 체계를 세웠다.
한글문학의 발전
그 이전에도 가사문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글의 창제는 가사문학의 발달을 부추겨 16세기에 이르러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은 그 절정에 달했고, 시조문학도 뒤이어 발달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한글소설이 발달하여 소설이 한글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춘향전〉·〈심청전〉 따위는 당시에 나온 한글소설의 걸작들이다. 이밖에도 〈계축일기〉·〈한중록〉·〈의유당일기〉 등 한글수필·일기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근·현대사
한글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어문생활에 등장한 것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한다.
즉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이 공포되어 기존의 한문 대신 국문을 공문으로 했는데, 제14조에는 이런 조치가 지나치게 혁신적이고, 이상적임을 인식했던지 국문을 본으로 하고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고 규정했다. 물론 이 조치는 우려했던 대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국한문이 주종이 되는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이전까지 공문서에 쓰이지 못했던 한글이 한자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일시에 한글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국민들에게 한글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의 소학교 국어교과서 〈소학독본〉이 국한문으로 표기되었고 갑오개혁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던 〈관보〉는 이듬해에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1895년 유길준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역시 국한문으로 펴냈고, 다음해 4월 7일에 독립협회에서 창간한 〈독립신문〉은 순한글에 한글 띄어쓰기를 시행했다.
한편 당시의 문자생활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근대의 사상에 눈뜬 일부 식자들은 국어의 근대화를 위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우선 국어 규범을 통일하기 위해 1905년 7월에 지석영(池錫永)의 6개항으로 된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 新訂國文〉이 공식으로 공포되었으나 사회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아 시행되지 못하자, 이를 심의하기 위해 1907년 7월에는 최초의 국어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창설되었다.
1909년 이 연구소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흐지부지되고 한글은 일제강점기의 수난기로 들어갔다.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이어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조사에 나서, 1911년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며(1920 출판), 1912년에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했다. 한편 주시경에 의해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재건되어 뒤에 '조선어학회'(1931)·'한글학회'(1949)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龍飛御天歌
조선조 건국의 사적을 적은 악장. 4대 세종 때 권제 · 안지 · 정인지 등이 명을 받들어 6대조, 곧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태조 · 태종 사이의 조선 창업을, 주로 중국 고사에 비유 찬송하여 지었음. 보물 제1463-1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계명대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글가사를 올린 치화평과 취풍형, 그리고 한문가사를 올린 여민락이라는 음악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일부만이 전한다.
訓民正音 解例篇
조선(朝鮮) 세종(世宗) 28년(年 : 1446)에 새로 창제(創製)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왕명(王命)으로 학역재 정인지(學易齋 鄭麟趾 : 1396~1478)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이 중심(中心)이 되어 만든, 전 세계(全 世界)에서 오직 한 권(卷)밖에 없는 한문해설서(漢文解說書)로서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목판본(木版本) 1책(冊)인데, 책(冊) 이름에 대해서는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똑같이 불러『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거나『훈민정음 원본(訓民正音 原本)』, 또는 해례(解例)가 붙어 있다고 하여『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라고도 함
총(總) 33장(章) 3부(部)로 구성(構成)된 이 책(冊)의 내용(內容)은 크게 세 부분(部分)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첫 부분(部分)은 세종(世宗) 어제(御製)의 서문(序文)과 새 글자의 소리내기․쓰임새를 밝힌 예의편(例義篇)을 합(合)친, 말하자면『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本文)에 해당(該當)하는 부분(部分)으로 15세기(世紀) 세계(世界) 음성학(音聲學)의 정상(頂上)을 선구(先驅)한 세종(世宗)의 과학사상(科學思想)을 입증(立證)해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 둘째 부분(部分)은 예의편(例義篇)을 해설(解說)하여 제자해(制字解)․초성해(初聲解)․중성해(中聲解)․종성해(終聲解)․합자해(合字解)․용자해(用字解) 순(順)으로 나눠 서술(敍述)한 해례편(解例篇)이며, 끝으로 책(冊)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이 셋째 부분(部分)이 됨
원래(原來)는 28자(字)로 된 알파벳(Alphabet)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중(中)에 4자(字)가 줄어들어 총(總) 24자(字)로만 사용(使用)되고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국어(韓國語)를 완벽(完璧)하게 표기(表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기와 사용(使用)하기에도 편리(便利)할 뿐 더러, 문자 체계(文字 體系) 자체(自體)로도 독창적(獨創的)이며 과학적(科學的)인 문자(文字)로 인정(認定)되고 있는데, 실제(實際)로 이 책(冊)에서 문자(文字)를 만든 원리(原理)와 문자(文字) 사용(使用)에 대한 설명(說明)에 나타나는 이론(理論)의 정연(整然)함과 엄정(嚴整)함에 대해서는 현대(現代)의 세계 언어학자(世界 言語學者)들도 대단(大壇)하게 평가(評價)하고 있음
(訓民正音 解例本 : 국보 제70호).